조선신탁 소유 땅에 들어선 민영휘 아들 민천식 묘
풍수전문가, “산중명당으로 용이 은신하는 자리”
민천식은 민영휘·안유풍 3남, 일제강점기 한일은행 지배인 대리 역임
민영휘가 갈취한 재산, 민천식 일가 승계
묘지, 왜색 가미해 호화롭게 치장
민천식 묘 위로 민영휘의 첩 안유풍의 묘도 존재

친일파 거두 민영휘의 첩 안유풍이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신탁한 청주시 상당구 산선동 138번지와 142번지의 현재 상태는 어떨까?

산성동 138번지(2317㎡)의 현재 지목은 ‘전’, 즉 밭으로 돼있다. 밭으로 돼 있지만 실상은 묘지. 토지 한 가운데 묘와 묘비가 조성돼 있고 이룰 오래된 수목이 둘러싸고 있다.

그렇다면 묘지의 주인은 누구일까?

묘비에는 통훈대부행(通訓大夫行), 홍릉참봉(弘陵參奉) 여흥(驪興) 민천식(閔天植)지(之)묘(墓), 배숙인(配淑人) 전주이씨(全州李氏‘라고 돼있다.

풀어보면 조선시대 제일 말단관직인 종9품직을 지낸 민천식과 그의 부인인 전주이씨의 묘라는 것이다.

묘비에 새겨진 것으로 보아 민천식이 ‘홍릉을 관리하는 종 9품’ 직인 참봉을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9품 말단 참봉의 묘비가 화려한 이유는?



민천식의 묘비석에는 구름 같은 갓이 씌워져 있다. 조선시대 묘 비석에 갓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묘지의 주인이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경우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면에서 묘 관리를 맡은 말단 종9품에 불과한 민천식의 묘 비석에 구름 같은 갓은 애초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민천식의 묘가 호화롭게 조성된 배경을 뭘까?

민천식이 바로 으뜸가는 친일파이자 당시 최고 갑부인 민영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1936년 6월 1일 발행된 잡지 『삼천리』는 ‘1200만원이라는 민영휘 재산은 어디로 가나?’ 기사에서 민천식에 대해 언급한다.

『삼천리』는 “민영휘 씨는 과연 유사 이래로 각 부호가들의 밟은 바 여인계 행정의 수준을 훨신 뛰어 나아가, 그의 절륜한 정력의 입아지된 여인군상이 얼마인지를 헤아릴 수 없는 중, 매일 좌우에 시립하고, 매야에 그의 향악을 위하야 대기하는 여성이 많었든 만큼, 대방마마를 수위로, 평양마마, 해주마마를 차석으로 연당마마 무슨 마마 하며 5, 6인의 첩실이 각각 주둔소를 설치하여 가지고 열석하여 계시다”며 민영휘의 복잡한 여성편력을 설명한다.

이어 “그럼으로 (민영휘) 씨의 그로 인한 인과이든지 대방마마께서는 혈속이 불행히 없고, 평양마마도 남자로는 없고, 오직 열위 중에 대복을 가진 해주마마가 삼형제의 아들 대식, 천식, 규식을 두어 삼위일체의 아기자기한 장면을 맨들었는데...”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대방마마’는 민영휘씨의 정실부인이고 ‘해주마마’가 민천식의 어머니 안유풍이다.

민천식은 당시 돈 1200만원(2010년 기준 8000억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보고서)의 재산을 소유한 민영휘의 재산 중 상당부분을 상속받는다.

『삼천리』는 기사에서 먼저 “민영휘씨가 세상의 *예*잡을 등지고, 영작, 화위, 극귀 극부, 애자, 총첩을 다 버리고 일거귀불귀를 한 후 민 씨의 그 거대한 재산이 과연 어디로 갔나?”라고 묻는다.
 
이어 “(민)씨가 생존할 시에 대체의 분배는 정하여 있어따 한다”며 “ 대체 윤곽을 보면, 민대식씨가 제일 거대한 분배를 받고, 그 다음이 민규식, 또 그 다음이 민천식(死亡)”이라고 밝혔다.

세부적으론 “천식(미망인이 관리)씨가 4만석의 토지와 수 만원의 현금을 가졌다”고 밝혔다.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138번지에 자리잡은 민영휘의 아들 민천식의 묘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138번지에 자리잡은 민영휘의 아들 민천식의 묘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138번지에 조성된 민천식의 묘비와 추모비, 왼쪽에 있는 추모비는 전형적인 일제양식이다.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138번지에 조성된 민천식의 묘비와 추모비, 왼쪽에 있는 추모비는 전형적인 일제양식이다.

 

민영휘의 재산 물려받은 민천식의 권세



민천식은 조선황실의 외척으로 최고 권세를 가졌고 당대 최고 부자였던 민영휘의 아들이었던 만큼 시시콜콜한 동정까지 언론에 보도된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유학’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휘문의숙 학도 민천식씨 등이 일본에 유학할 차로 삼작일에 발정하였다더라”라고 보도한다.

1910년 3월 19일 대한 매일신보는 민천식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보도한다. ‘떡 해먹지’란 제목의 기사에는 “보국 민영휘씨의 집 반찬 만드는 늙은이의 딸이 나이 지금 16세인데 민 씨의 아들 천식 씨가 그 계집아이와 통간하여 백년가약을 맺었더니 천식 씨의 부인이 그 사실을 알고 일전에 그런 일을 부모에게 고발하였음으로 큰 풍파가 났어다더라”라고 보도한다.

같은 해 8월 31일 매일신보는 민천식이 여름방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내용까지 보도한다.

민천식은 아버지 민영휘가 백성을 수탈하고 모은 재산과 한일병합 공로로 일제로부터 받은 은사금을 모태로 세운 한일은행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던 중 1915년 사망한다.

그가 사망하자 언론들은 그의 직위를 ‘한일은행 지배인 대리’로 표기하며 사망사실을 보도했다.

 

“산중명당을 앞에 두고 용이 은신한다”는 안유풍과 민천식의 묘자리



민 씨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남이섬을 포함해 수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국고에 환수된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번지에 있는 안유풍의 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조선신탁 명의로 되어 있는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138번지에 소재한 민천식의 묘도 그대로 두고 있다.

이에 대해 ‘문화공간 우리’ 최우정 사무국장은 “안유풍과 민천식의 묘가 있는 상당산성 일대는 천혜의 명당 자리로 알려져 있다”며 “후손들이 이를 이유로 묘를 옮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풍수지리 전문가들의 의견을 어떨까? 40여년 동안 풍수지리를 연구한 풍수인 유청림씨는 안유풍의 묘 터에 대해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회인 피반령을 넘어 선도산용이 좌선행룡으로 것대산 봉수대를 지나 망산에서 좌선회룡하며 청주 상당산 성내로 들어온 용이 산중명당을 앞에 두고 진두에 맺을 혈로 회룡이 은신하는 격”이라고 설명했다.

유청림 씨는 “혈 급의 자리”라며 “안유풍의 묘 수장비는 그가 살아있을 때 지어진 것이고 묘지에 있는 석물 등은 전형적인 왜식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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