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4) 제주로 온 15만명 피난민에 다수의 문화예술인도
한국전쟁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지역 예술 거점...제주 현대 예술의 씨앗 역할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다방은 문화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오와시쓰’(oasis)이다.”

낯선 외래어 표기가 인상적인 1955년 3월 15일 ‘제주신보’ 기사의 한 구절이다. 지금이야 ‘다방’ 두 글자가 적힌 간판은 대도시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옛 흔적이 남아있는 소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흡사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멸종 공룡처럼 느껴진다.

다만, 한때 지구를 호령했던 공룡들처럼 다방은 30년 넘게 제주 지역에서 복합 예술 문화 공간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특히 피난민들이 몰려온 한국전쟁을 계기로 제주에서 예술 문화가 다방과 함께 새출발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료 인용은 <두 번째 돌하르방들 이야기>(2011), <제주생활문화 100년>(2014), <일도1동 역사문화지>(2018) 등을 참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제주에는 피난민들이 잇달아 들어온다. 1951년 5월 기준 제주로 건너온 피난민의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절반이 넘는 15만명에 달했다. 전쟁이 멈추고 2년이 지난 1955년 제주도 인구는 28만8700명으로, 해방 직전 1944년 당시 22만1000여명보다 7만명이나 많았다.

피난민 가운데는 문화 예술인이 상당수 섞여있었고, 그들은 길고 짧은 피난 기간 동안 칠성통 다방을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가지면서 지역민들의 예술 문화 요구를 자극했다. 피난민이 몰려들며 칠성로 일대엔 새로운 다방문화의 시대가 열렸고, 하나둘 생겨나는 다방의 주인들 중에는 피난민들이 적지 않았다. 새로운 정보와 뉴스에 목말랐던 피난민들에게 다방은 유익한 사랑방이 된 셈이다.

제주로 피난 온 예술인들은 계용묵, 장수철, 옥파일, 김묵, 최현식, 김영삼, 문덕수(이하 문인), 이중섭, 장리석, 홍종명, 최영림, 김창열, 이대원, 최덕규, 구대일, 옥파일(이하 미술인), 김국배, 계정식, 이성재, 이성삼, 변훈, 박재훈, 김금환, 고희준(이하 음악인), 송훈, 이배정, 가칠성, 김광빈(연극·영화인) 등 당대를 대표했던 이름들이다.

계용묵 선생(앞줄 가운데)을 모시고 고영기 박철희 강통원 김성주 김종원씨(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했다. 계용묵 특집으로 꾸며진 '제주문학'31집에 실린 사진이다. ⓒ제주의소리
계용묵 선생(앞줄 가운데)을 모시고 고영기 박철희 강통원 김성주 김종원씨(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했다. 계용묵 특집으로 꾸며진 '제주문학'31집에 실린 사진이다. ⓒ제주의소리

 

1960년대 칠성로의 모습. 칠성로는 예나 지금이나 상가와 문화시설의 밀집지로, 당시 문화예술인들은 칠성로의 여러 다방을 중심으로 교류와 소통을 이어나갔다. 계용묵은 제주에 머무르는 3년5개월 동안 칠성로 동백다방을 주 활동지로 두었다. 동백다방이 있던 터에는 지난 1998년 표석을 세워 그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2」에서 발췌. ⓒ제주의소리
1960년대 칠성로의 모습. 칠성로는 예나 지금이나 상가와 문화시설의 밀집지로, 당시 문화예술인들은 칠성로의 여러 다방을 중심으로 교류와 소통을 이어나갔다. 계용묵은 제주에 머무르는 3년5개월 동안 칠성로 동백다방을 주 활동지로 두었다. 동백다방이 있던 터에는 지난 1998년 표석을 세워 그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2」에서 발췌. ⓒ제주의소리

고영자 박사는 <일도1동 역사문화지>에서 “초기 제주도에 피난민들 중 상당수가 정부의 고위관리나 부유층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동문시장, 관덕로, 칠성로 일대에 모여들어 제주 토박이들과 뒤섞여 살기 시작했다. 이 일대는 전쟁 시국 속에서도 그나마 활기가 넘치던 번화가였다. 6.25 피란민 속에 학자와 예술 문화인들이 유입되자, 중앙 문인과 인간적 교류 기회가 많아졌다. 문화예술의 모든 에너지가 칠성통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응집됐다”고 설명한다.

그 중에서도 피난민 노파가 개업한 것으로 알려진 동백다방(1951~1955)은 소설가 계용묵(1904~1961)과의 관계로 지금까지 명성을 자랑한다. 동백다방에는 피난민 계용묵이 단골로 출입했는데, 제주에 체류하는 동안 동백다방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고순하 우생당 사장이 계용묵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우생당은 1945년 문을 연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책방)으로 지금도 중앙로에 3대를 이어 운영 중이다.

동백다방은 계용묵의 제주 생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계용묵과 인연을 나누었던 양중해 시인(1927~2007)이 생전에 회고한 내용을 보면 제주에서 아들 혼례를 치렀을 때도 계용묵은 몇 평 안되는 동백다방을 예식장 삼아 테이블에 양과자를 놓고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래서 계용묵을 만나려면 동백다방에 가라는 말이 있었다. 계용묵이 동백다방에 머무는 동안 많은 문학인들이 모여 토론, 품평회를 열었다. 계용묵은 양중해, 김종원, 고순하 등 제주의 20대 문학청년들과 종합교양지 <신문화(新文化)>를 창간하고, 문학동인지 <흑산호(黑珊瑚)>를 발간한다. 뿐만 아니라 강통원, 문충성, 조명철 같은 도내 학생들이 모인 ‘별무리’ 역시 지도했다. 1950년대에 등단한 양중해·김종원·최현식은 계용묵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계용묵의 후배, 제자들이 이후 제주 문단을 책임지는 작가로 성장했으니 제주 문학계에 있어 계용묵과 동백다방의 역할을 상당하다. 이를 기념하며 1998년 한국문인협회는 동백다방 터에 ‘계용묵 선생의 문학산실’이라는 표석을 세우기도 했다.

왼쪽은 1층에 위치한 동백다방 사진(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오른쪽은 동백다방 터로 추정되는 칠성로 가운데 세워진 '계용묵 선생의 문학산실' 표석. ⓒ제주의소리
왼쪽은 1층에 위치한 동백다방 사진(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오른쪽은 동백다방 터로 추정되는 칠성로 가운데 세워진 '계용묵 선생의 문학산실' 표석. ⓒ제주의소리
동백다방 터로 추정되는 칠성로에 1998년 세워진 계용묵 작가의 표석. 계용묵 선생의 문학산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계용묵은 제주에 머무르는 3년5개월 동안 칠성로 동백다방을 주 활동지로 두었다. ⓒ제주의소리
동백다방 터로 추정되는 칠성로에 1998년 세워진 계용묵 작가의 표석. 계용묵 선생의 문학산실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계용묵은 제주에 머무르는 3년5개월 동안 칠성로 동백다방을 주 활동지로 두었다. ⓒ제주의소리
김정택(김순택) 전 세종의원 원장이 기억을 더듬으며 그려낸 1950년대 칠성통 지도. 출처=일도1동 역사문화지. ⓒ제주의소리
김정택(김순택) 전 세종의원 원장이 기억을 더듬으며 그려낸 1950년대 칠성통 지도. 출처=일도1동 역사문화지. ⓒ제주의소리
붉은 색 표시된 곳이 동백다방이다. ⓒ제주의소리
붉은 색 표시된 곳이 동백다방이다. ⓒ제주의소리

동백다방은 여러 화가들도 스쳐 지나갔다. 안타깝게 요절한 제주 화가 강태석(1937~1976)은 1954년 오현중학교 졸업과 함께 동백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만농 홍정표, 소암 현중화, 일석 장희옥, 해정 박태준, 한명섭, 김택화, 김병화, 김형찬 등 많은 미술인들이 동백다방에서 작품을 소개했다.

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은 <제주생활문화 100년>에서 “피난길에 내려와 머물다 간 예술인들은 제주에 저마다의 추억을 남겼고, 큰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이 제주의 문화예술계로서는 커다란 도전이자 자극이었다. 또한 그것이 한 톨의 씨알로 남아 오늘의 제주문화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물꼬가 트인 제주의 다방 문화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제주카메라클럽 창립 멤버로 다방에서 여러 차례 전시를 가졌던 신상범 전 제주도문화원 연합회장은 <제주의소리>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이야 오늘 날이야 전시장, 공연장, 카페 등 역할에 맞는 열린 공간이 여러 개 있지만, 예전만 해도 전시, 모임, 음악 감상, 휴식 같은 문화 활동을 가능한 장소가 다방이 유일했다. 특히 그림, 사진 전시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고 말한다.

남궁다방(1955~1963)은 1955년 고영일·부종휴 작가가 사진전을 개최한 장소로 유명하다. 제주사진회 창립전을 비롯해 <제2회 전도바둑대회>도 남궁다방에서 열렸다. 특히 인근에 ‘의회보’라는 신문사가 위치해 있어 많은 언론인, 정치인들이 남궁다방을 애용했다.

1961년 제주라이온스클럽이 탄생한 청탑다방, 1964년 사진가 홍정표가 처음으로 제주 민속사진을 전시한 무지개다방, 1965년 제주카메라클럽 창립식이 열린 호수다방, 1965년 영주연묵회 서예전을 시작한 요안다방, 강요배·백광익 등이 속했던 ‘관점 동인’ 창립전이 열린 대호다방 등 다방마다 예술의 향기가 퍼져나갔다.

1968년 10월 19일 제7회 한라문화제 기간 동안 산호다방에 전시된 미술 작품을 구자춘 제주도지사(맨 오른쪽)와 일행이 관람하고 있다. 제공=김정택. ⓒ제주의소리
1968년 10월 19일 제7회 한라문화제 기간 동안 산호다방에 전시된 미술 작품을 구자춘 제주도지사(맨 오른쪽)와 일행이 관람하고 있다. 제공=김정택. ⓒ제주의소리
강태석 작가의 유작전을 안내하는 홍보물. 1976년 대호다실에서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강태석 작가의 유작전을 안내하는 홍보물. 1976년 대호다실에서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여기에 1970년부터 80년대까지 제주 미술인들의 전시장이 돼 준 소라다방, 정다방, 산호다방까지 포함하면, 다방 문화는 지역 미술사에 무시 못할 존재감을 가진다. 제주 다방은 1970~80년대에 DJ와 함께 하는 음악다방으로서도 면모를 가진다.

그러나 자판기 커피, 카세트 플레이어의 도입으로 다방은 서서히 자리를 잃어간다. 오영주 교수는 <일도1동 역사문화지>(2018)에서 “다방, 다실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커피숍’으로 바꿔달고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며 1990년대로 향한다. 칠성통 다방 문화는 다양한 의류 매장이 들어서면서 ‘로데오 거리’의 쇼핑 문화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교사와 친구 덕분에 일찌감치 다방의 매력에 눈을 뜨며 제주의 다방 문화를 정리해온 김정택(전 세종의원 원장)씨는 <제주의소리>와 만나 “1950년대 다방은 아침 6시부터 문을 열었는데 그때 ‘모닝커피’ 한 잔 마시고 일하러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닝커피에는 노른자를 넣어서 주곤 했는데,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따뜻한 우유 한 컵에 노른자를 넣어 줬다”고 추억했다.

김정택 원장이 인터뷰 과정에서 직접 그린 과거 다방 풍경. 탁자 위에 커피잔과 재떨이, 팔각 성냥갑, 설탕통 등이 놓여져 있다. 정겨운 풍경이다. ⓒ제주의소리
김정택 원장이 인터뷰 과정에서 직접 그린 과거 다방 풍경. 탁자 위에 커피잔과 재떨이, 팔각 성냥갑, 설탕통 등이 놓여져 있다. 정겨운 풍경이다. ⓒ제주의소리

그는 “누군가는 그때를 제주 문화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제주는 4.3과 전쟁을 연이어 겪으면서 지역 예술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쟁쟁한 피난 예술인과 만나는 기회가 생겼지만 제주 문화의 특성이 발휘할 틈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 사람들이 떠나고 나니 ‘제주 예술을 살려야 겠다’는 자각이 비로소 생겨났고 그때부터 제주 문화가 성장했다. 1950년대에 제주문인협회, 제주미술협회가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바탕에 바로 다방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그때처럼 싼 가격에 차 한 잔 시켜서 하루 종일 버티는 건 지금은 힘든 일이다. 어려운 시기에 나름대로 다방만의 낭만이 있었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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