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확정되면 형사보상과 손해배상 소송 예상...남은 300여명 4.3행불인 판결에 영향

내란-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행방불명 수형인들이 사상 첫 무죄를 선고받은 가운데, 21일 재심 청구인들이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판결에 대한 환영하고 있다.ⓒ제주의소리
내란-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행방불명 수형인들이 사상 첫 무죄를 선고받은 가운데, 21일 재심 청구인들이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판결에 대한 환영하고 있다.ⓒ제주의소리

제주4.3 당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행방불명된 수형자들에 대해 법원이 사상 첫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4.3생존수형인의 무죄 판결에 이은 낭보로, 추후 300여명의 4.3행불인에 대한 재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21일 4.3 당시 내란실행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故 오형률씨 등 행불인 수형자 10명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10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판은 이례적으로 검찰의 구형 직후 곧바로 선고가 이뤄졌다.

검찰은 "이번 재심 사건은 사안의 특성상 일시와 장소를 특정해 게재한 것만으로도 공소 사실이 특정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례에 비춰 공소 제기를 전제로 해야 재심 개시 결정이 이뤄질 수 있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 유족의 진술과 4.3진상조사보고서, 수형인명부 등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공소사실을 특정지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어 검찰은 "공소사실은 내란죄,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나 이 사실을 입증할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며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구형한다"고 밝혔다. 구형량이 검사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청객에서는 기쁨의 환호가 터져나왔다.

검찰은 최종의견을 통해서도 "피고인의 생사 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70여년을 기다린 재심 청구인들이 이 재판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고, 4.3희생자들의 아픔과 고통이 치료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도 검찰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특히 재심청구인들이 고령이고, 공소 내용에 대해 다툴 여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 구형 직후 즉시 선고 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형사처벌에 대한 입증의 책임이 있는 검찰도 아무런 증거가 없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공소 사실에 범죄의 증명이 없음에 해당하므로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이어 "이 사건은 4.3이라는 극심한 혼란기, 국가 정체성을 찾지 못했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피고인의 목숨마저 희생됐으며 그 유족들은 오랜기간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고통을 당해왔다"며 "오늘 판결의 선고로 유족들에게 덧씌워진 굴레를 벗고,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들도 저승에서라도 오른쪽 왼쪽 따지지 않고 마음 편히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란-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행방불명 수형인들이 사상 첫 무죄를 선고받은 가운데, 기쁨의 눈물을 짓고 있는 유족들. ⓒ제주의소리
내란-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행방불명 수형인들이 사상 첫 무죄를 선고받은 가운데, 기쁨의 눈물을 짓고 있는 유족들. ⓒ제주의소리

70여년간 맺힌 한을 풀게 된 유족들은 그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故 오형률 할아버지의 아내인 현경아 할머니는 재판이 끝난 후에도 연신 눈물을 흘렸다. 현 할머니는 "이제 아이들도 결혼을 하고 하니까 (남편이)너무 생각이 났다. 볼 수도 없고, 말 할수도 없고, 이제사 너무 생각이 난다"고 애틋한 심경을 꺼냈다.

딸인 오정희씨도 "어머니가 100세가 넘었는데 항상 '이게 풀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했다. 이대로 가면 남편을 만나볼 면목이 없다는 애기를 항상 해왔다"며 "오늘 판결로 응어리를 풀어줘서 너무 감사드린다. 오늘부터는 정말 가슴이 시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라진 형님을 대신해 싸워 온 서영진씨도 "70여년 동안 마음 편히 살아와본 적이 없다. 연좌제니 뭐니 해서 아이들까지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며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억울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 올바른 판결을 내린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제일 억울한 것은 돌아가신 형님이지만 고마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구형대로 선고가 이뤄진 만큼 이날 재판 역시 항소 없이 선고가 확정될 전망이다. 선고가 확정되면 향후 무죄 판결에 따른 형사보상과 이후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

한편, 지난해 4.3생존수형인 8명에 대한 무죄 판결과 궤를 같이 하는 이날 판결로 인해 남아있는 300여명의 4.3행불인에 대한 재판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6월3일 행불수형인에 대한 첫 재심 청구 이후 현재까지 집단 재심사건에 동참한 행불인은 332명으로, 고인이 된 이들을 대신해 소송에 뛰어든 유족 등 재심 청구인은 325명이다.

당초 피고인은 349명, 재심청구인은 342명이었지만 재판 도중 재심 청구인이 사망하거나 재심 청구를 취하하며 인원이 줄었다. 이들은 장장 18개월에 걸쳐 심문 절차를 마쳤다. 이날 10명에 대한 선고가 마무리됨에 따라 나머지 청구인에 대한 재심 개시 여부도 순차적으로 결정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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